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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ll

흰종이 위에 선을 긋는다.

선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종이 위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선들로 가득 차다.

그 와중에 어긋난 선은 지우개로 지운다.

하지만 지워진 자리에는 선 자국과 지우개로 지운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 위에 또 선을 긋는다.

 

 흰종이 위에 선이 그어지듯이 인간은 경험을 통해서 스스로를 형성해 나간다. 경험은 시간 흐름에 따라 내면에 침식된다.

 어긋난 선이 그렇듯 삶에서 지울 수 없는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다. 말하지 못하고 가슴 깊숙이 잊고 싶은 기억, 이러한 기억은 회피하거나 타인이 알아차릴까라는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은 채로 살아간다.

 

‘두려움. 또 다시 반복할까란 두려움.’

‘없었던 일처럼 잊는 것이 가능할까?’

 

 인간은 일상에서 많은 기억을 덮어두고 산다. 불현듯 덮어 두었던 기억이 찾아올 때면 평소와는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불안정한 기억 일수록 두려움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게 된다.

 기억을 잊고 현실에 만족한 채 살아간다고 하여도 지우개로 지운 것과 같이 흔적을 남기게 되고 지우려는 행위 또한 다른 흔적을 재생산 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실재하는 행위 없이 흔적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흔적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되짚어 볼 수 있는 원인이자 현실의 그림자이다.

 

 인간 내면에 각인 되어지는 기억에 흔적을 고찰하는 ‘Null’ 작업은 내면 영역에 희미하게 남겨진 기억의 잔재를 사진으로 재현 하였고 기억에 흔적을 표현하고자 필름 위에 스크래치를 내어서 형상화 하는 재연 방식을 택하였다. 본인은 스크래치 행위를 통해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흔적을 의식의 표면 위로 끌어올려 과거를 되짚어 보고 기억을 붙들며 잊지 않으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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